[우주전쟁]을 긍정하다.

- (아름다운) 지옥

강변에 빠진 인간들을 빛이 발하는 촉수들이 낚고 있고, 강변 저편 언덕에서는 파란 광선으로 사람들을 옷감만 남기고 태우는 아수라장이 펼쳐집니다. 그것을 열패감으로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야하는 상황. [우주전쟁]은 스필버그가 작정하고 만든 지옥입니다.

그 지옥 속에서도 아름다운 장면을 포기할 줄 모르는 낭만파 스필버그는 의도적으로 강물에 떠내려오는 주검을 거무튀튀하게 처리하고 피아노의 선율을 담은 듯 극적으로 처리합니다. 나풀거리는 옷들이 꽃잎처럼 떨어지는 장면들은 또 어떤지요. 이 숲속 혹시 [A.I.]의 그곳 같지 않나요? 휘엉천 밝은 로봇 사냥 풍선이라도 뜨지 싶습니다.

후반부의 붉은 색조 가득한 식물투성이 대지엔 아주 질려 버렸습니다. 무서운 양반 같으니라구.

- 아무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유럽이 평온하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유럽이 먼저 박살났다고 말합니다. 지하의 오길비는 일본의 오사카에서는 녀석들을 물리쳤다고 하지만 그게 올바른 정보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레이를 비롯한 숱한 사람들은 지하 속의 트라이포드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숨겨져 있다고 말을 하지만 차단되고 한정된 짐작과 정보 사이에서 누구든 단언할 순 없습니다. 결국 이런 영화의 불친절함은 후반부 대다수의 관객들을 당혹케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영미권의 근대 고전이라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웰즈의 [우주전쟁] 원전이 우리에게까지는 익숙하기는 힘들 터, 모든 것을 설명할 생각조차 없는 영화의 불친절함마저 겹쳐 몇몇 관객들은 분노합니다.

- 공포와 조우하다

분노와 또다른 차원으로 관객들은 의아함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E.T]의 스필버그가 왜 이렇게 되었지?'의 범주입니다.

글쎄요. 그는 처음부터 외계인이든 이형의 무엇이든 그것과 조우하는 순간의 경이감과 극적인 면에만 경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것이 소년과 손가락을 맞대는 호의적인 외계인이든, 찰흙 모형 산더미를 광적으로 만드는 성인 어른을 맞이하는 거대 비행접시 속의 외계인이든, 지면을 뚫고 나오는 거대한 트라이포드든.

미지에의 경이감과 공포는 종이 한장처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 고전 취향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명법이긴 했지만 '아서 코넌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를 [쥬라기공원]의 2번째 시리즈 부제로 삼은 전력 답게 스필버그는 고전의 구조 속에서 현재의 인물들을 장기 말처럼 쏟아붓어 배치하는 것을 즐기는 듯 합니다.

그래서 '테러 이후'의 미국을 무대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입니다. 레이의 아들 로비는 외계인의 만행을 목도할 때마다 못된 얼굴을 찌푸리며 '저놈들을 물리치러 가야 한다'는 신경질쟁이고, 광선에 맞은 사람들의 가루를 잔뜩 뒤집어 쓴 레이의 모습에서 '9.11' 당시 현장 부근의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하의 오길비에게 원작 [우주전쟁]에 등장하는 목사의 정신병적 언사와 포병의 궐기 의식을 오롯히 수혈해 준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적합해 보입니다. '테러 이후'의 거대한 징크스 덩어리 같은 오길비는 이후 생존의식에 가득찬 부권에 의해 살해 당합니다.

- '아빠' 톰 크루즈

[A.I.] 이후 스필버그의 필모는 어떤 '뭔가'가 보입니다. 이유는 알 순 없지만 스필버그는 영화 속에서 '아버지'라는 역할 모델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는 듯 합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 아들을 잃은 트라우마의 아버지는 약물 중독에 시달리는 요원.
[캐치 미 이프 유 캔] : 역할 부재의 실제 아버지 / 대체 아버지 역할의 수사관.
[터미널] : 아버지가 남겨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은 미국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아버지라는 역할 모델에 관한 문제는 흔히들 말하는 '스필버그식 가족주의'니 하는 편한 수사법에 편입이 가능하겠지만,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고...

톰 크루즈는 스필버그와의 작업에 또 한번 아버지 역할을 맡은 셈인데, 저는 그의 전체 필모에서 아버지 역할을 맡은 빈도가 현저히 낮다는데 주목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스필버그와의 작업에서 그는 여전히 아버지 역할을 2번 거듭하고 있으며, 여전히 '불안한 위치'의 아버지라는 것임을.

- 해피엔딩이 아니다

영화 말미, 보스턴에서 나머지 가족(?)과의 상봉을 경험하는 레이, 그를 레이라는 이름이 아닌 '대디'라고 호명해주는 로비이긴 하지만 이를 두고 가족의 봉합이니 하는 수사로는 설명하고 싶진 않군요. 그는 아버지라는 불안정한 모델을 전쟁이라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 딸을 건사하는 것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하긴 했지만, 그 이후에 그에게 온전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선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살인을 경험하기도 한 그, 그리고 그를 비롯한 모두들에게 전쟁 이전과 이후는 결코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영화 전체가 어떤 징크스로부터 기원해, 미적지근한 봉합으로 그 징크스가 완치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듯 해 시종일관 암울 했었습니다.

모건 프리먼의 목소리로 원작의 건조한 아우라를 정색하고 재현하는 대목은 아예 잔인한 농담을 듣는 기분 같기도 하고.
- 서스펜스 기계

전에 썼다시피(참조 포스트) 스필버그의 이 영화에서 기대한 것은 그가 가진 서스펜스 연출력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충족 되었구요. 영화의 첫번째 공포가 영상이 아닌 '소리'로 표현되는 부분은 예상치 못한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이후 도심 중앙에 육중하게 솟는 트라이포드의 장관부터 영화는 전쟁의 공포를 충실하게 재현해 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공동으로 맞서는 자나 침략자의 입장이 아니라 시종일관 내내 몰리는 피난민의 시점으로! 영화 속 서스펜스는 대부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많이 죽고 고생하는걸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맙소사.

물론 몇몇 부분은 익숙한 스필버그식 서스펜스입니다. 촉수는 분명 랩터 대가리의 새로운 버전이고, 사람들이 바글대는 선착장에서 인정머리 없이 떠나는 선박이 먼저 뒤집어질 것임은 누구든 예상했겠지요.

그런 가운데 원작을 재현한 '사람 담은 바구니'의 현대적 번안은 꽤나 섬칫한 것이었습니다. 스필버그식 서스펜스와 원작의 바삭 마른 어조가 자아내는 이런 효과 등이 여름 영화의 어법 중 '공포스러움'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이 영화를 긍정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by 렉스 | 2005/07/18 11:52 | [집히는대로 영화담 | 트랙백 | 핑백(2) | 덧글(11)

Linked at ▶렉시즘(rexISM) : 여.. at 2007/10/31 12:41

... . 전혀 다른 이야기. 나란 사람의 취향을 몇가지 샘플로 들자면.- 최고의 슈퍼 히어로 영화 : 이안 감독의 [헐크]- 스필버그의 최고작 : [우주전쟁](http://trex.egloos.com/1553225)...음 좀 이상한 취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어쩌겠냐는 흐. ... more

Linked at 렉시즘 : ReXism : 1.. at 2008/04/21 09:27

... 안노 히데야키복수는 나의 것 (02) - 박찬욱 반지의 제왕 : 반지원정대 (01) - 피터 잭슨박하사탕 (99) - 이창동씬 레드 라인 (98) - 테렌스 멜릭괴물 (06) - 봉준호우주전쟁 (05) - 스티븐 스필버그조디악 (07) - 데이빗 핀처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07) - 코언 형제타이타닉 (97) - 제임스 카메론그러니까 이런 목록을 보고 '아니 봉준 ... more

Commented by 하늘처럼™ at 2005/07/18 11:58
흠.. 소설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부쩍들었지요..
내용을 알지못하니.. 뭔가 뚝뚝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구요..
터미널보다 나아보이는건.. 저뿐일까요..? -_-;;
Commented by 계란소년 at 2005/07/18 15:08
극도로 현실적입니다만, 그래서 오히려 스티븐 답지 않게 컬트적이지요.
Commented by THX1138 at 2005/07/18 15:34
그리하여 전 저 영화가 좋습니다. 스필버그 영화 답지 않아서 좋아요.
Commented by neungae at 2005/07/18 19:13
아직 보지 않아서 별스런 덧글을 달을 수 없다는..
그래도 인사는 해야했었기에..이렇게..덧글을..
남긴다는..^^..좋은 저녁요..
Commented at 2005/07/18 19: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isery at 2005/07/19 01:34
저는 후기에서 별로라는 식으로 썼었지만 사실 생각할수록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Commented by ▒夢中人▒ at 2005/07/19 10:08
역시 한번쯤 봐줘야하겠죠?ㅋ
Commented by Nariel at 2005/07/19 11:56
음.. 저는 금자언니를 ^^
Commented by 렉스 at 2005/07/19 18:17
하늘처럼™님 / 으허..책은 완독 다 되어 가시는지요?+_+

계란소년님 / 그 정색함과 마무리에 사람들이 많이 등을
돌린 모양이더군요. 전 좋았습니다 흐.

THX1138님 / 네 저두요 :) 다시 보고 싶습니다;

neungae님 / 헤헤...오늘 하루도 좋은 저녁입니다!

비공개님 /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 변화의 일단이 다음
뮌헨올림픽 이야기에도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조금
섣부른 판단이겠죠?

미저리님 / 저도 실망한게 분명 있는데, 이 영화가 좋습니다;

몽중인님 / 역시 보는게 좋을 성 싶습니다;

나리엘님 / 앗..저도 봐야 합니다;
Commented by 영원제타 at 2005/07/20 17:14
SF식 공포영화라면 '에일리언'밖에 생각이 안납니다.
Commented by 렉스 at 2005/07/21 18:52
영원제타님 / 확실히 공포의 음습함와 SF의 소위 화려함을 동시에 지닌
가장 최고의 시리즈는 [에일리언]이 독보적이네요 :)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