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피터 잭슨: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팬보이. [집히는대로 영화담


아카데미가 제임스 카메론을 '세상의 왕'으로 등극시킨 건 그가 화려한 언어를 지닌 사람이라서가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헐리우드 극장가에 '3시간짜리 이야기'가 다시 통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 공로일 것이고, 그 '3시간짜리 이야기'가 경천동지할 새로운 구경거리이기 때문이었겠죠.

이후는 모두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글래디에이터]로 검투사들의 광장이 재현되고 이어서 [트로이] [알렉산더] 같은 영화들이 반쪽의 성공과 실패를 고루 안았습니다. 자본/상영시간/스케일에 대해서 겁낼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죠.(물론 인상적인 실패는 다시 제작사들을 위축시켰습니다) 다른 한쪽에선 피터 잭슨이 헐리우드 입문작 [프라이트너] 이후 상상을 초월한 프로젝트를 실현시켰습니다.

2004년 12월과 올해 1월 우린 꽤나 심심해 했었죠. 바로 그 [반지]가 없었습니다. 원작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동반한 대중적 '비틀기'로 그는 3시간짜리 3부작을 극장가의 신화로 안착시켰고 개인적인 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것은 잘 알다시피 [킹콩] 프로젝트였죠.

팬보이 정신이랄까. 영화 속의 피터 잭슨은 정말 신나보입니다.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이 감독은 [킹콩] 한편에 미국 영화 산업 초기와 뉴욕에 대한 헌사를 동시에 내다 바치는 듯 합니다. 묵직한 폰트의 타이틀이 지나간 후 그는 농담처럼 원숭이를 잠시 보여주고 그것이 빛바랜 톤의 뉴욕 어딘가의 동물원임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발랄하고 낙천적인 가사의 재즈 넘버가 나오고 교통체증과 경제불황의 일면을 모두 껴안고 있는 뉴욕의 여러 면모를 과시하듯 보여줍니다.(이 빛바랜 톤의 뉴욕의 영화 후반부의 눈 덮힌 화려한 모습과 대비됩니다)

칼 덴헴은 어떻구요. 지어낸 세트를 재활용해 새로운 영화를 찍어내고 촬영한 사파리컷으로 얼기설기 붙은 영화용 필름을 만드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작가적 의욕을 신경질적으로 발산합니다. 입에 붙은 사기성 멘트와 엉망이 된 필름을 보고 그 자신이 발음한 '라이브 애니멀 캡처'(야생 동물 포획자)로 변모하는 광기적 면모는 미국 영화계의 신화인 오손 웰스와 피터 잭슨 그 자신 사이 어딘가의 모습일 것입니다.

피터 잭슨의 유머 감각은 'RKO'와 페이 레이에 대한 언급과 갑판에서 찍어대는 고색창연한 톤의 영화에서 정색을 발휘합니다.(너무나도 확연한 원전 인용의 즐거움!) 이 짖궂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면 감동적인 오리지널에 대한 헌사로 이어지는데 피터 잭슨에게 있어 짖궂음과 진실함은 둘다 해당사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지널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서 브루스 박스터의 단단히 어깨에 폼이 들어간 모습은 단순히 유머일 것이며, 해골섬의 공룡들은 뜬금없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피터 잭슨이 자신이 꿈꾼 장면들을 재현해내는 장면들이 정말이지 이 영화의 진국일 것입니다.

[쥬라기공원]? 입 다무는게 좋을 겁니다. 마이클 크라이튼과 스필버그가 호박 화석에 있던 모기의 피를 뽑아 개구리의 유전자와 어쩌구하며 과학적 근거연 하던 [쥬라기공원]과 달리 [킹콩]의 공룡들은 해골섬에서 끊임없는 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발상된 순수한 상상력의 소산입니다.

훨씬 세밀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웨타의 공룡들은 ILM의 공룡들에 비해 일반적인 생태 방식과는 어긋나 있습니다. 큼직한 먹거리를 입에 물고도 하얀 속살의 여인네에게 달려가는 V-렉스는 정말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이렇듯 해골섬의 모든 피조물들은 등장 인물들에게 끊임없는 서스펜스를 조장하기 위해 비좁은 협곡에서 달려들고 한시도 가만히 놔두질 않습니다.(웨타의 공룡들은 ILM의 공룡들에 비해 울음소리도 좀 시원찮아요 : 웃음)

우르크하이 보다는 2.3배 더 무서운 원주민은 물론이거니와 벌레와 거미들의 지옥도는 악동 피터 잭슨이 아주 작정을 하고 만든 순간순간입니다. V-렉스의 아가리 부분에까지 원작의 디테일을 삽입하는 부분엔 두손 두발급이라고 봐야겠죠. 이렇듯 해골섬은 모든 부분에서 정점인데 3시간이라는 여유만만한 상영시간에 피터 잭슨은 당연히 앤과 킹콩의 교감 부분을 넣습니다.

사기 수표를 남발하는 칼 덴헴 마저도 앤에게서만큼은 배우를 캐스팅하는 감독의 진실한 태도를 보여주는데, 앤역의 나오미 왓츠는 확실히 출중합니다.(이런 그녀를 바라보는 잭 드리스콜의 눈매는 뭔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역대 킹콩의 '여인들' 중 그녀는 확실히 능동적이며 소리를 덜 지르는 편에 속합니다. 영화 성격상 킹콩의 손에 쥐어지며 지면과 공중을 오가는 그녀는 어쩔수 없이 에로틱해지기는 하지만 붉은 빛의 아스라한 해와 하늘을 바라볼 때의 순간만큼은 그녀는 킹콩이 유일하게 허락한 '동반자'의 자격입니다.

슈퍼 '잭 드리스콜' 마리오!(.........)
 
피터 잭슨의 징그러움은 후반 뉴욕 부분에서도 발휘되는데 그는 이 이야기가 자칫 신파로 흐를 부분에 대단한 경계심을 발휘합니다. 센트럴 파크의 흐뭇한(기가 막히게 감동적인!) 얼음판 장면에서 그는 지긋히 바라보는 두 남녀(!)의 교감을 일순 육군의 포격으로 끊어놓는가 하면, 마지막 부분 관객의 눈가에 물이 맺힐까 말까한 대목 쯤 되서 킹콩의 등에 복엽기의 총알을 박아놓습니다.

그리하여 킹콩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갈 때 피터 잭슨은 화려하고 고즈넉한 뉴욕의 풍광의 모습을 담은 기술적 성공과 두 남녀가 현실적으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정서적 파국을 동시에 담아놓습니다. 정말 대단하게도.

이로써 피터 잭슨은 이번에도 자신만의 오리지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팬보이 정신으로작가적 성공을 이뤄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징그러운데 여기서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킹콩]은 정말 헐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이뤄낸 뉴질랜드 출신 작가의 성공적 입성기의 연승행진인가, 아니면 [타이타닉]처럼 시간이 갈수록 저평가될 '로맨티시즘 대작'의 거품일 뿐인가.


+ 하워드 쇼어가 만들었을 사운드트랙은 어떤 모양새였을까요?

++ 덧글을 보자면 '패닉'을 먼저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일정이 바빠져 일단 손이 오가는 녀석을 먼저 집어낼 수 밖에 없었....

덧글

  • 이십오 2005/12/19 11:07 #

    오늘 또 봅니다. OTL
  • lukesky 2005/12/19 11:09 #

    .....제가 보러갈 수 있는 시간은 모조리 매진이더군요. ㅠ.ㅠ
  • 하늘처럼™ 2005/12/19 11:14 #

    무척이나 잘 뛰는 그녀였습니다..
  • 나름대로 2005/12/19 11:47 #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색깔로 나타내는 것도 참 대단한 재능이겠죠.
    연타석 흥행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영화판에선 미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
    (박찬욱 감독처럼 입에다 투자자 안망하도록 하겠다는 소릴 달고 다니진 않아도,
    상업주의하에선 누구도 이런 압박에선 자유로울 수 없는듯)

    사실 괴수나 재난영화에는 그닥 흥미가 없어서 관심밖이었는데 요즘 평들이
    너무 좋아서 끌리는군요. (예전작들로 예습하지 못하는게 참 아쉬울 정도)
  • 건전치이링 2005/12/19 11:50 #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계란소년 2005/12/19 12:12 #

    3시간 시대여 다시 오라!!(...라지만 점점 시간이 없어지는 사회)
  • 도일 2005/12/19 15:04 #

    ..살찐 피터잭슨은 정말이지 귀엽지 않아요./ 다시 살찌운 다음에 호빗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 blackthone 2005/12/20 02:11 #

    ... 역시 콩 하면 동키콩이군요.(논점일탈)
    어제 보고 왔는데 정말 잭슨 횽아 원츄입니다. 센트럴파크 신은 사랑스럽더군요. 그나저나 앤 대로우의 언더웨어(?)는 정말 튼튼합니다;;
  • Noche 2005/12/20 04:41 #

    이번주 중에는 꼭 보러 가야겠어요.
    피터잭슨을 워낙 좋아해서...
    실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꿈을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 렉스 2005/12/20 09:58 #

    이십오님 / 저도 또 보고 싶습니다.

    루크스카이님 / 직장인의 비애;;

    하늘처럼™님 / 코미디 극단에서 스파르타식으로 조련시킨 결과입니다.(근거 없음)

    나름대로님 /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박스셋을 구입하시고(퍽)

    건전치어링님 / 앗...감사합니다><)

    계란소년님 / 던전 시즈 극장판도 3시간으로!(환불 사태가;)

    도일님 / 그냥 자기 시나리오 작품 했음 좋겠습니다;

    blackthone님 / 앤 대로우의 발바닥은 고무고무입니다. 심지어 모험호를 타고 난뒤엔
    뭘 먹지도 않더군요!

    Noche님 / 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_+(과대 광고이려나;)
  • EST_ 2005/12/20 17:58 #

    결국 세번째 관람해 버렸습니다.
    세시간짜리 영화를 세번째 보는데도 지루하지 않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 렉스 2005/12/21 07:52 #

    EST_님 / 이해가 갑니다. 저도 두번째 '뷰티풀' 장면에서 가슴을 툭툭 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 괜히 가슴이...
  • 치이링 2005/12/30 01:07 # 삭제

    뒤늦게 킹콩을 봤습니다. 즐거웠습니다.
  • 렉스 2005/12/30 08:18 #

    치이링님 / 저도 그 기분 상상이 갑니다 :)
  • 샤리 2006/01/04 15:36 #

    음... 원주민과 곤충이 너무 무서웠지요(..) 우리의 여주인공은 진정한 히로인이었고요. 맨발로 정글을 뛰고 날고 하는데 기스 하나 안나는 초강철 몸을 자랑하시더군요(응?) 나름 재미있게 봤습니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p.s 나오미 왓츠를 보면서 니콜 키드만을 연상한 사람은 정녕 저 하나인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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