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랄랄라 하우스]


[랄랄라 하우스
| 김영하 저 | 마음산책]

세월이 지났다. 몇 년이 흘렀다. 돌연 거리에 태극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태극기 숭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가상의 개념인 국민을 선취하기 위해 누구나가 태극기로 자신을 감쌌다. 해병전우회, 축구협회, 반미 시위대, 친미시위대, 기독교도, 불교도, 붉은 악마, 노동조합, 퇴역군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혹은 대형 태극기 아래에서 대한민국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희가 말한 바의 태극, 그러니까 “각각의 수많은 갈라진 이치들이 천하 공공의 이치인 태극에 귀결된다”는 그 태극이 아니다. 하나의 달이 여러 모습으로 현현하는 그런 태극도 아니다. 이것은 태극기 숭배 아래 어쩔 수 없이 하나였던, 아직 채 분화되지 않은 상태를 그리워하는 복고적 퇴행의 몸부림이다. 국민국가의 성원으로서 우리가 정말 하나였던 시절이 있었던가?

아닐 것이다. 단지 분화가 채 덜 되었던 것일 뿐. 태극은 언제나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경지였다. 따라서 지금의 태극기 붐은 실제로는 갈라질 대로 갈라진, 이미 하나의 동일체라고 할 수 없는 집단들이 국민국가적 정통성을 선취하기 위해 벌이는 상징 선점 경쟁이다. IMF 관리체제를 지나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 노소와 장청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지난 대선은 단지 양쪽의 집계산이었을 뿐이다.

태극기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고통스런 작업을 조금은 지연시켜 주었을 따름이다.  

[P.170~71 : 문단 나누기는 옮긴이 임의로]

짐짓 가벼울거라고 생각한 책에서 발견하는 이런 문장, 정말 좋다.

by 렉스 | 2006/07/07 12:59 | [집히는대로 책담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가짜집시 at 2006/07/07 13:03
김영하로군요. 책장을 펴기도 전에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극소수의 작가들 중 한 명인.
Commented by 이오스캔 at 2006/07/07 14:33
렉스님께 또 고백. 김영하씨 싸이 몰래 훔쳐본 적 있어요.
안녕하세요 렉스님. 블로그에서는 처음 인사 드립니다.
저는 이오스캔입니다.
Commented by 렉스 at 2006/07/08 13:32
가짜집시님 / 최근 이 양반의 이야기거리에 다시금 재미를 붙이는 중입니다 :)

이오스캔님 / 반갑습니다^-^)/
Commented by sixtyone at 2006/07/08 22:30
훔. 읽어볼까나... <렉스 포탈>에서 이오스캔님도 보고 위에 이사무님도 보고 후후훗 즐겁군요. -ㅅ-
Commented by 렉스 at 2006/07/12 15:00
sixtyone님 / 렉스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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