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설탕]
시은이 몸담고 있는 제주도는 마권의 욕망과 승부의 조작이 오가는 과천의 풍경과 다른 순수의 세계입니다. 여기에는 일찌기 어머니를 여읜 소녀가 2대에 걸친 말에 대한 애정을 몸바친 곳이지요. 이 순수의 세계에 펼쳐진 제주도의 드넓은 초원은 바로 그녀와 천둥이가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넓다란 대지가 있는 기능적인 공간이죠.
대신 과천엔 승부 조작과 남자들의 암투,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해야 하는 현실적 압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적 고지식함과 천박함으로 무장한 양복 남자와 냄새나는 작업복과 폭력, 그 가운데서 시은과 천둥이는 홀로 고고하게 그들만의 순수함을 지켜야 합니다.(채찍질을 가하던 시은은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천둥이를 그녀 방식대로 다룹니다)
물론 영화가 지지하는 방식은 그녀와 천둥이의 순수함입니다. 그 순수함에 대한 만만찮은 대가를 치르게는 하지만 그 순수함이 유발하는 목적이 사실 하나라는 것에 대해선 솔직합니다. 바로 '눈물'이죠. 그러나 그 눈물이 그렇게 절실하게 떨어지진 않습니다.(개인적으로는 한 방울도 안 나오더군요)
어느덧 시은과 천둥이만 홀로 남은 듯한 그 비현실적 자리에서 시은은 - 관객들과 같이 울자며 - 눈물 짓지만 그 호소력의 길이는 아득해 보입니다. 시은과 천둥이만은 남은 그 곳과 객석의 거리감은 그만큼 멀어 보입니다. 남는건 의외로 기술적 성과입니다. 아직도 천둥이와 친구들(?)이 두구두구 말발굽 딛던 경기장 장면이 떠오르네요.

[타짜]
마권의 욕망이라고 위에서 운운했지만 투전판의 욕망은 욕망이라고 부르기에 너무나 무섭고 아찔합니다. 그건 욕망이나 생존 감각이라기 보다는 누가 손목을 잘라줘도 정신 못차릴 '악귀에 사로잡힌 영혼'의 세계랄까. 그런 덕에 그들은 스스로를 '짝귀'나 '아귀', 아니면 고고한 '타짜'라고 명명하지만 그 채바퀴 안에서 필사적으로 맴도는 다람쥐의 몸부림에서 결국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을 맴돌게 하는 것은 삽으로 퍼도 모두 모자랄 돈의 힘이겠지만, 그 강건한 힘과 순환 속에서 피폐해지는 것은 그들의 지갑이 아니라 육신이겠죠.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손목을 내리칠 칼날을 움켜쥔 적도 친구도 없는 세계. 이 세계를 [범죄의 재구성]보다 훨씬 날렵하게 최동훈 감독은 그려냅니다.
최동훈 감독의 1차적인 수훈갑이 그의 화법과 편집이라면, 그에 견줄만한 성과는 역시나 배우들의 힘입니다. 밉상으로 미소를 지어도 어떻게 그렇게 소년의 미소가 나오는지 신기할 지경인 조승우, 마담과 깍쟁이 처녀를 오가는 김혜수의 능구렁이 같은 경지, 이런 식의 배역을 너무 맡았다지만 잘하는걸 어떡하나 싶은 백윤식, 입만 떼면 관객들을 즐겁게 만드는 유해진까지... 모두 훌륭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한 김윤석(아귀 역)은 [천하장사 마돈나] 이후 또 한번 저를 혀 내두르게 하더군요. 전 이 사람이 강두로 나오는 [괴물]을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느릿하고 비비 꼬인 색스폰 음악과 곳곳에서 잘 빚어진 디테일. 영화적 장치로 말쑥하게 만들어진 세상의 풍경이겠지만 정말 세상은 무서운 거 같아요. 이런 영화 보면.




덧글
까막 2006/10/06 00:06 #
잘 읽었습니다. 타짜 보고싶어요. +_+ 범죄의 재구성 재미있게 봤었는데...
메피스토 2006/10/06 00:32 #
고스톱..도박은 다 싫어요. 영화한번 보고싶군요.
꿈의대화 2006/10/06 01:20 #
원작만화의 열렬한 팬으로서 보기엔- 좀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
휘오나 2006/10/06 01:51 #
삽으로 돈을 퍼나르던 장면에서 도박으로 사람을 이끄는게 무언지 알 것 같기도 했어요.
nano 2006/10/06 16:43 #
타짜는 감독, 배우 모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영화..하지만 역시 타짜나 사생결단같은 걸 보고 나면 무서워요;;
포비 2006/10/06 20:46 #
타짜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강두 역활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러고보니 그럴 듯 할 것 같기도.^^
silverwing 2006/10/07 18:19 #
김윤석씨는 볼때마다 새로워요. 배우,감독 다들 너무 좋았던-_ㅠ♡
영원제타 2006/10/07 21:39 #
삽이라니, 저런 '삽질'은 매일같이 하고 싶겠군요.
렉스 2006/10/07 21:45 #
까막님 / 까막님은 영구 귀국하시면 밀린 영화들 모두(....)메피스토님 / 전 규칙도 몰라요. 노는 쪽은 후후.
꿈의대화님 / 원작은 모르는게 어쩌면 다행이군요.
휘오나님 / 보던 저도 한 삽도 퍼다오 했으니;
나노님 / 이제 사생결단은 슬슬 잊혀져가는 영화에요. 후후.
생각해보니 별로였던 영화;
포비님 / :)
silverwing님 / 김윤석씨 아침 드라마 예고 장면에서 보고 깜짝;
영원제타님 / 제 가방 안에 한 삽만 퍼준다면 하하.
펄 2006/10/09 10:31 # 삭제
타짜는 만화책으로 정말 재미있게 봤었는데, 영화도 괜찮다니 꼭 보고 싶네요. 물론 아기 땜에 극장에서는 못 볼 거 같고.. 비됴 나오면 빌려봐야 할 듯;;
렉스 2006/10/09 19:08 #
펄님 / 이제 아기 때문에 ;_;) 그래도 이쁘고 크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