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Djuna) / 태평양 횡단특급 [집히는대로 책담

태평양 횡단 특급 / 듀나 / 문학과 지성사


지금은 기억이 흐릿한데, [학생과학]인가 하는 어린이용 잡지가 있었다.
즉 [어깨동무] [소년중앙]류의 만화+연재물 컨셉의 잡지류에서 '과학'이라는
테마를 핵심으로 내세운 잡지였는데.. 간간히 이 잡지에서 별책부록으로
SF 고전 단편류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번역해서 첨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이후에 처음 집어들은 SF 소설인 셈이다.
그만큼 SF는 내 영역이 아니었고, 독서나 사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이가 지나서 집어들은 이 책이라고 쉽게 내 속에서 육화되리란 만무.
SF는 물론, 환상문학류까지 접수한 이 책의 세계관이 그동안 내가 접하던
윤대녕의 시원으로의 회귀니, 성석제의 골계미 가득한 언어의 세계관,
장정일의 타자기 앞에서 수음하기의 세계관과는 멀리 떨어짐은 자명한 일.


일단 '인간다움'을 쿨하게 저버리고 난뒤, 정색을 하고 기계 육체들과 시공간에
대한 난상토론을 하니 힘든 대목이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것은 또 아니고... 게다가 영화에 대한 흥미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손뼉을 칠 안나 파퀸, 뱀피, 아시모프의 익숙한 이름들이 소설 속에서
훽훽 지나간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정체성과 이력을 쿨하게 '살짝' 노출하니 흥미롭기도.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부부들이 나오지만 부부 관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은 없다.
남편들은 그냥 어딘가에서 죽고, 부인들은 그에 대해 추모할 생각도 없다.
인간다움이 없는 자리에 남은 것은 지금 세상에 없는 어떤 문명과 기계장치들에 대한
'있는 척'의 덤덤한 묘사들 뿐. 그 안에 숨은 작가의 다식함이 스노브한 코드에 녹아
독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알면 즐겨라."


[대리 살인자]는 모뎀 통신 시절의 발랄한 상상력을 옮긴 듯 하며,
[첼로]는 뷰욕의 뮤직 비디오와 아시모프가 조우한 듯 하며,
[끈]은 대중 문화에서 보여지는 '시간 여행'에 관한 정리 겸 리포트 같다.

[꼭두각시들]은 왠지 영화 [가타카]처럼 드라이하게 만들면 뭔가 될 것 같기도...



SF의 세계가 생경해 미쳐 잘 닿지 못한 자의 1차적 감상 마친다.


덧글

  • kritiker 2004/09/16 20:55 #

    전 사유는 접어두고...그저 결말을 위해 보는 얄팍한 독자랍니다;;
  • 잠본이 2004/09/17 01:06 #

    '첼로'에서는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카와 그 연인 쪽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웅)
  • 렉스 2004/09/17 10:00 #

    크리티커님 / 결말을 위해 열독해주는 독자가 고마운 저자들도 많습니다 :)


    잠본이님 / 반갑습니다 :) 암튼 작품집 전반에서 가장 농염한 편이었죠 :)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W 위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