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27일
아버지와 아들 : [쥐]/[대한민국 원주민]

아트 슈피겔만 저 | 아름드리미디어
가스실의 악몽을 하나둘 들려주는 아버지 보다 여전히 수완좋은 장사꾼 시절의 손재주와 결벽증, 신경증적인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현재 시점의 아버지가 더욱 인상적이다.
이 처치곤란한 부계 혈통을 부인할 수도 없고, 그러나 무조건 포용할 수도 없는 작가의 자전적 고백은 작품을 둘러싼 비통한 기운 중 하나이다. 이 위태로운 평행선은 결국 '반쪽짜리 고백'만을 남긴 아버지가(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는 아내의 자살이라는 무거운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아들이 확인했어야 할 아내의 일기장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세상을 떠남으로써, 아들에게 남겨진 정신적 부채감이라는 형태로 희미해진다. 그럼으로써 남은 것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가감없음과 음영으로 구성된 그림체의 황폐한 리얼리즘이다.
최규석 글,그림 | 창비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가진 몫을 위해 양보와 희생을 한 누이들에게 사과를 건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랬다는 만화체의 기록, 최규석은 그게 더 솔직함이라는 것을 안다.
역시나 인상 깊었던 것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입담 좋고, 사람 수완 좋은 거 빼고는 가족에게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 그러나 이제는 장식장 속에서 같이 늙어버린 어머니와 환하게 웃는 - 아버지에 대한 기록들은 와닿는 부분이 많다. 동네를 향해 소총을 갈기던 비행기 속의 미군은 미워하지 못하고,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빨갱이를 여전히 저주하며, 식칼과 작두를 들이대며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무지랭이 가부장. 지겹시리 싸워대던 부모님의 악다구니를 자장가 삼아 억지 잠을 청해보던 유년의 기억이 있는 독자라면 그 기분 실감할 것이다. 최규석은 그런 아버지를 껴안으며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억지 봉합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희미해질 그 평행선을 상기하며 그저 살아갈 뿐이다.
# by | 2008/06/27 11:53 | [집히는대로 책담 | 트랙백 | 덧글(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쩝. 느낌이 꽤 강렬했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