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닛 테러] : A급이 된 B급.

1. 핵전쟁으로 초토화된 지구. 황량한 도로 위엔 무섭고 날카로운 걸 잔뜩 달아놓은 자동차와 바이크가 폭주 갱단에 의해 질주하고 지평선 저편에서 고독한 총잡이가 등장한다. - 그런데 이건 [매드맥스2]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 그는 폭주 갱단에 의해 여동생이 납치 당해 윤간을 당하자 구출하기 위해서 홀홀단신 나서서 악을 응징하는데...

2. 테러 집단에 의해 가정이 초토화된 왕년의 퇴직 형사, 그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산탄총과 권총을 실은 자가용을 몰고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데... - 이건 아마도 척 노리스 무비.

3.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행성, 공주가 악의 집단에 의해 납치되고 변두리 행성에 있던 한 청년과 시종 로봇은 그녀를 구하기 위하여 모험을 나서는데... - 그런데 이건 [스타워즈 에피4]도 아니고, 심지어 그 패러디 무비인 [스페이스 볼]도 아니다.

=== 이상은 내 성장기에 아버지가 빌려온 정체불명의 비디오 테이프 목록들 중 일부이다. 언제나 자신의 직감 보다는 대여점 주인 아저씨의 구라(!)에 넘어가 이런 싸구려 액션 영화를 빌려오신 아버지. 길바닥과 건물 벽면에 질질 뿌린 시너에 확 달라붙는 불과 값싼 폭파 장면, 흐릿한 안개에 중요부위가 가려진 노란 퍼머 머리 여자들이 수영장에서 허우적 허우적, 흙먼지 묻히며 데굴데굴 구르며 피를 뿜다가 응징 당하는 악의 심복들. 아...아버지, 어쩌자고 이런 영화들을 빌려 오셨나요.

보안관 아저씨도 못 말리는 정의서린 복수의 주먹, 끊임없는 총알 공급, 앞에 달라붙은 같은 비디오 회사의 다른 영화 예고편도 만만찮았던 낮은 품질, 재빠른 반납, 그리고 이상한 걸 또 빌려오시는 아버지. 그렇게 수년간 빌려온 목록 중에서 제대로 된 영화가 딱 두편 있었는데... [프레데터]와 [터미네이터 1편](그나마도 복사본!!)이었다. 아들이 방학 동안 큰댁 사촌누나들 방에서 본 [스크린]의 내공을 믿었다면 훨씬 좋은 목록을 보실 수 있었을텐데. 하긴 아들에게 대여를 맡겼다면 [그렘린]이나 [윌로우] 같은 것만 잔뜩 빌려 왔겠지.

=== [플래닛 테러]의 본편과 앞에 달라붙은 '가짜' 영화 예고편 [마쉐티]를 보고 느낀 것은 바로 그때의 정서였다. 물론 '그라인드 하우스' 프로젝트 자체가 그런 정서의 의도적 복원이라는 점에서 두 감독의 시도는 성공한 셈이고. 다만 [데스 프루프]를 안 본 나로선 어느 쪽이 좀더 우위냐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못한다. [플래닛 테러]가 그 정서 복원을 위해 사용한 몇몇 기술적인 면이 사실은 굉장히 '웰메이드'해 보이는게 사실이다. 아무리 의도적으로 너절한 대사를 넣고 - "잘 빨게 생겼는대요"-, 홀라당 타버린 필름 장면 뒤에 모든 등장 인물들이 과정 생략하고 모두 규합해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탄탄한 영화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가짜 싸구려' 영화가 주는 즐거움은 결국 지직거리는 화면과 뿌연 톤이 아니라, 감독 자신이 만든 스코어 위에서 펼쳐지는 한바탕 '가차없는 짓궂음'의 향연들이다. 절단과 파괴 보다 '고름'에 약한 이들은 좀 피하는게 좋을 듯. 나머지는 낄낄 거리며 보면 된다. 일반 탄알과 유탄이 어떤 원리로 각각 발사되는지 알아보려 했다가 그냥 포기했다. 설명 없다. 푸하하.

- 타란티노는 꼭 지같은 대사만 한다.
- [더 록] 이후로 정말 간만에 본 마이클 빈...아. 격세지감이다.
- 난 왜 조쉬 브롤린의 그 피곤한 인상이 좋은걸까.
-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립스 메뉴를 죽죽 빠는 아해들이 이 영화를 보면 참 좋겠다 싶다.
- [데스 프루프]와 더불어서 결국 결론은, '남자들 깝치지 마라'인가.

by 렉스 | 2008/07/08 14:37 | [집히는대로 영화담 | 트랙백 | 핑백(1)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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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렉시즘 : ReXism : 복.. at 2008/07/13 16:25

... [플래닛 테러](http://trex.egloos.com/3816837)를 보고 깊은 감화를 받은 들순이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윽고 자신의 닉을 '복분자 달링'으로 불러달라 요청한다. 영화상의 여쥔공의 이름 '체리 달링'에 ... more

Commented by 페리체 at 2008/07/08 14:49
타란티노의 바로 그 장면(...)은 진짜 악취미의 정점이랄까 뭐랄까 (그러면서도 싫지 않은). 사실 징그러운 거 잘 못 보는 편이라 재미있게 보면서도 좀 고생했는데 이거 원 기분 나쁘면서도 웃음이 계속 나와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09 13:11
쓰지도 못할 것을 들이대는 그 용기에 반했습니다. 바보놈 ㅜㅜ)
Commented by 마에노 at 2008/07/08 16:17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립스 메뉴를 죽죽 빠는 아해들이 이 영화를 보면 참 좋겠다 싶다.


;;;;;; 상상해버렸습니다.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09 13:11
소스에는 소금을 조금 넣어서...
Commented by Lainworks at 2008/07/08 22:10
혹시 국내개봉판에서 Thanksgiving 예고편 붙었나요? 가능성은 낮아보이지만 혹시나 해서.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09 13:12
안 나옵니다.
Commented by 정worry at 2008/07/08 22:48
마셰티 예고편 보면서 '... 내용 다 나오네...' 이 생각밖에 안 나더라고요. 진짜 만든다는 설을 들어서요 - -;;; 근데 진짜 플래닛 테러는 어쩌면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뻔한 걸로 그렇게 웃기는지 ;;; 이런 게 실력이고나 싶어요. 타란티노, 진짜 골때렸어요!!! ^^;;;;
Lainworks님. 마셰티 말고는 없어요. 자막 끝까지 기다렸건만 T_T 케서방 나오는 예고편 보고 싶었거든요.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09 13:13
마쉐티를 3부작 비디오용으로 만든다는 이야긴 어디서 본거 같아요. 허허;;
/ 엘 레이의 그 경박스러운 활극 액션이 너무 웃겨서 극장에서 구르고 싶더라구요. 하하.
Commented by PETER at 2008/07/09 13:16
언니들이 다 족쳐버리는 솜씨 구경!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09 13:16
주사기 언니도 인기가 많더군요. 흐흐.
Commented by 사이동생 at 2008/07/09 17:36
B급영화 B급영화 이러는 사람들에게 돈 잔득 들여서 스타몇명놓고 조폭이니 억지코믹이면 A급이냐 라고 말하고 싶어요. B급이 어때서!!!!!

그런데 저 위에 3편은 무슨 영화인가요.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10 13:03
본문 문장에 '정체불명의 비디오 테이프'라고 적었죠. 이젠 제목조차도 기억이 안 나요.
Commented by 유카 at 2008/07/10 09:22
플래닛테러도 재밌지만, 진심으로 마쉐티가 제작되길 바라는 초마초성향의 여성이 여기있어효!

로드리게즈 만세!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10 13:03
마쉐티가 나온다면야 그 아저씨의 악역 배우 인생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듯 해요. 흐흐
Commented by 3fisher at 2008/07/10 15:46
안녕하세요, 피쉬운영자 3fisher입니다.
이 포스트가 피쉬스토리(http://story.3fishes.co.kr) 에 공개되었습니다.
이런 날씨에 저렇게 입고 오토바이타고 달리면 시원하겠네요.
Commented by 렉스 at 2008/07/11 12:14
앗 오랜만이시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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