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균열된 세상에 대한 가장 무서운 비유법.

토미 리 존스는 주지하다시피 배트맨 극장판의 '첫번째 저주'였던 [배트맨 포에버](조엘 슈마허 감독/95)에서 하비 투페이스 역할을 맡았었다. 그는 수년 후 07년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노회한 보안관을 연기하며 불가해한 세상에 대항할 힘을 잃고 은퇴를 결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유와 근원조차 알 수 없는 악이 횡행하며, 그 악들이 죄없고 사연모를 사람들의 머리통에 핏구멍을 남기는 끔찍한 세상이다. [배트맨 포에버]에서 동전의 앞과 뒤로 범죄 대상의 목숨을 결정짓던 그는 수년 후 다른 영화에서 동전의 앞뒷면으로 목숨을 결정짓는 사이코패스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의 범죄 현장을 확인한다. 이 묘한 우연은 판이하게 다른 두 영화의 분위기를 체감하게 하는데, 결국에는 두 범죄자 공히 동전의 앞과 뒤라는 선택을 주게 하지만 결국에는 목숨의 게임의 권력은 쥐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통하다.

배트맨 졸작 시대를 연 [배트맨 포에버]의 출연자 하비 투페이스, 아니 토미 리 존스는 미국영화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예감케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에서 뒤늦은 참회의 실토를 하는 셈인데 이 미국영화의 신기원이라는 흐름에 새로운 배트맨 이야기가 가세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새로운 배트맨의 세상은 아이맥스의 힘을 빌어 장대하게 뻗은 빌딩숲이 나온다 뿐이지 기실 [노인을 위한 나라]의 바삭 마른 불가해한 세상과 다를 바 없다. 악은 카드 한장을 남긴 채 연쇄범죄를 일으키고, 악에 대항하는 정의는 과욕 충만으로 위태로운 경계선에 서있다. 이 다른 양 극단은 상당히 일견 외따로 떨어져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 가장 친화력 있게 조우할 가능성이 열려있다. [다크 나이트]에서 악의 총화인 조커는 이 가정법을 하비 덴트, 즉 하비 투페이스로 인해 증명한다. 그의 두 배를 놔둔 '시민 대상 사회성 테스트'가 유희적 실험이었다면, 하비 투페이스의 탄생은 제법 공들인 작업이다. 조커는 이 실습물을 배트맨에게 제출한다. "재밌지?"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코믹스 원작 히어로물이 한 해를 마감하는 영화 베스트니하는 목록에 당당히 등재될 수준, 아니 그 이상의 걸작으로 자리잡게 되다니. [슈퍼맨 리턴즈]는 지나치게 엄숙했고 친신화적이었다. [엑스맨 : 라스트 스탠드]는 지옥유황불에 튀겨질 필름이었다. [스파이더맨3]는 3부작 형식의 매듭을 위한 너무 성급한 수습물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반 정도는 불안했던 [배트맨 비긴즈](05)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의 히어로물을 훨씬 뛰어넘는 회심의 역작이다. 이 시간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단 말인가.(참조 링크 : http://trex.egloos.com/3856165)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려내는 DC 코믹스 기원의 고담 시티는 [배트맨 리턴즈](팀 버튼 감독/92)의 (단 한번도 낮 장면이 없다는) 고담 시티와 달리 현실의 대도시와 닮았지만, 조그마한 희망도 품지 못할 정도로 빽빽하고 강건하게 빌딩숲을 이루고 있다. 놀란이 그려내는 배트맨의 새로운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악은 응징 당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품고 있는 힘의 원천에서 여전히 도사리고 있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이 희망없음은 배트맨을 일반인들이 용인할 수 있는 법과 상식의 테두리가 아닌 '지하의 영역'으로 내몬다. 그는 영원히 '백기사'가 아닌 '다크 나이트'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터미네이터2]와 3편 사이에서 사라 코너와 아들 존 코너의 이야길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으며,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듯이 배트맨의 정의는 보편적인 법의 테두리와 상식에서 이해될 수 없는 범주가 된다. '비긴즈'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온다. 라스 알 굴이 이끄는 (태고적부터 있어 왔다는)'암살단'들은 그들이 느끼는 악의 극의 상태를 완전히 제거해야만 세상이 '정화'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개인을 없애는 것이든, 한 도시를 궤멸시키는 것이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그들의 '선'이자 '정의'이다. 브루스 웨인, 즉 배트맨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강화시켜준 이들의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이 윤리적 균열과 모순을 '악'으로 규정하고 간신히 제압한다. 불타고 남은 것 없는 저택의 피해만으로 이 위험천만한 영웅놀이가 끝나야 할 일을 몰랐을 시점이었다. 그 시점에서 영화는 다소 설레는 톤으로 배트맨의 '비긴즈'를 말했고, 조커의 등장 도입을 알렸다.

이 시점에 시작하는 [다크 나이트]에서 브루스 웨인이 혹독하게 체감하는 교훈은 무서운 것이다. 그가 그의 방식대로 '정의'를 실천하고 악이라는 대상을 '응징'하면, 악은 다른 대화법으로 응수한다는 사실을. 가짜 배트맨이 도시에서 출몰하고, 다시 등장한 '허수아비'는 "이건 널 위한거야"라는 궤변을 늘여놓는다. 군수업체 사장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08)에서 가벼운 톤으로 보여줬듯 군비 증강과 무기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테러리즘을 더욱 강화한다. 테러리즘을 애초에 제압한다는 명목으로 화려한 미사일들이 산맥을 뒤덮는 연기로 포화시켜도, 역으로 테러리스트는 그 미사일을 구매하고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 순간 [다크 나이트]는 현재 정세에 대한 우화가 된다. 정말 얄궂게도 [다크 나이트]를 걸작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 공의 상당수는 '9.11 이후'라는 끔찍한 징후에 돌려야 할 것이다. 9.11 이후 보복성 침략(이걸 그네들은 '선제공격'이라고 미화[?]했다)과 이에 따른 '또다른' 보복성 테러 확산이 보여준 광경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다크 나이트]는 이때부터 점점 무서운 영화가 되어간다.

'나는 분명히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를 보러 갔는데, 왜 저 화장한 남자만 등장할 때마다 [양들의 침묵]만큼 무서워지는걸까.' 조커는 이 영화에 떨어진 정의와 악을 가르는 윤리적 딜레마라는 명제를 자꾸만 시험하는 잔혹한 악마다.(설마 천사라고 부를순 없을거다) 이 남자는 상대방의 얼굴에 '칼침'을 놓기 전에 그때마다 다른 사연 - 즉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닌 텅빈 장광설 -을 늘여놓으며, 3류 애송이 강도부터 1급 전범 독재자를 오가는 현란한 악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 모든 놀라운 광경은 전적으로 자신의 영혼까지 갉아먹은 연기력의 히스 레저로 인해 가능했는데, 결국 '잭 조커'(잭 니콜슨이 역을 맡은 조커를 일컫음) 이후 20여년만에 얻은 마지막 영광이다.

애초에 배트맨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카드 흔적' 연쇄범죄자 정도로 남았을 이 골칫거리는 배트맨 덕에 더욱 더 창의적인 악의 진화체로 성장한다. 불타는 로마의 전조 같은 화폐 태우기는 기본이고, 도시 전체를 윤리적 시험에 들게하는 권능적 면모, 브루스 웨인이 일찌기 '도시의 새로운 희망'으로 점찍은 '백기사'마저 정의의 반대편이라는 극단에서 충실히 행동하게 만드는 임상실험학의 성공까지! 그는 수다를 열심히 떤다. 배트맨 너와 노는 것이 너무 좋고, 네가 나를 만들어줬다고, 서로의 존재로 인해 가치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 악의 수다 앞에 더이상 강할 수 없을만치 강한 형태로 '정의'라는 명제를 실천하던 배트맨과 하비 덴트는 서로 무기력해지거나 악의 세포로 물들어가는 정의인자를 목도하고야 만다.

하비 덴트에게 있어 결국 동전 던지기는 자신이 행하는 정의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는 장치이자 마음속으로 되뇌이는 마인드콘트롤 같은 최면이었을 뿐이다. 그가 법의 이름을 걸든, 앞에 서있는 복수자에게 총을 겨누던, 동전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행하는 처단만이 정의이다. 이 순간 하비 덴트, 또는 하비 투페이스가 던지는 동전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의 동전과 큰 차이가 없다. 해석 불가능한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의 동전 던지기나 법의 심판자의 동전 던지기나 '그저 마음 가는대로', 처단 당해야 할 대상 앞에 놓여진 엄숙한 의례일 뿐이다. 이게 정의라는 허울이 가진 하잘것없음이다.

브루스 웨인, 또는 배트맨이 가진 정의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흡사 '감시사회' 이론의 충실한 실천 같은 감청 시스템은 이 히어로를 결코 '백기사', 햇볕의 영역에 놓을 수 없게 만든다. 그 역시 그것을 인지했는지 종내에는 이제부터 경찰들이 자신을 쫓게 만들라는 요청을 한다. 비록 감청 시스템은 스스로 폐기하지만 앞으로 배트맨은 법의 영역이 아닌 초법적 영역의 순간에 들어간 이상 더욱 막막하고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놀란은 이것을 굳이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의가 강성한 힘으로 모든 뒤틀린 법도를 잡으려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정의는 제힘을 잃고 쓰러지거나 하잘것없는 상태에서 변질된다. 조커는 테러리스트의 인질비디오를 연상케하는 영상으로 고담 시티 시민들을 경악케한다. 놀란은 이렇게 세상의 이야기를 빌어 [다크 나이트]를 완성한다. '9.11 이후' 미화된 이름의 정의가 악을 정의하고 누르려다, 세상을 더욱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고담 시티는 언제나 뉴욕의 비유로 인지되었지만, 이 순간 고담 시티는 우리가 사는 세상 모든 장소의 비유가 되고 말았다.

[다크 나이트]는 이 세상에 대한 152분간의 가장 황홀한 비유이자, 히어물 주제에 너무나 적합하게 우리의 윤리를 건드리는 직설법이다.

by 렉스 | 2008/08/09 21:11 | [집히는대로 영화담 | 트랙백(8) | 핑백(3)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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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게하는 - 작품. 보고 난 뒤에 성대모사로 주변사람들을 상당히 근심스럽게 만들 수 있는 작품. [다크 나이트]의 경우 말도 안되는 소리나마 장광설을 펼치게하는(http://trex.egloos.com/3858571) 충동을 일게하는데, [월-E]는 장광설 보다 영화가 가슴 속에 남긴 속깊은 감수성을 그냥 간직하게 만든다. 다른 의미로 머엉~. ... more

Linked at 렉시즘 : ReXism : 다.. at 2008/08/15 11:14

... 1. 윗 그림은 그리고 난 뒤 '텄다' 싶어서 방치중이었는데, 그냥 올립니다. 아무튼 2차 관람, 지난번 포스팅(http://trex.egloos.com/3858571)을 작성하고 걸린 점이 있었는데, 분명히 가슴 벅찬 것도 있었는데 왜 글에선 정작 절망적인 결론을 낸걸까였다. 2차 관람 후에 느낀 점은 절망적으로 보 ... more

Linked at 렉시즘 : ReXism : 왓.. at 2008/08/27 13:41

... 데이브 기본즈 그림 / 정지욱 역 [300]의 감독이 얼마나 각색과 번안의 묘를 발휘해 영화적 성취를 이룰지 모르겠지만, [왓치맨]의 영상화가 앨런 무어의 결말을 충실히 옮긴다면야 [다크 나이트]의 암담함 쯤은 엄살로 비치게 할 것이다.(하지만 큰 기대는 안한다.)[왓치맨]은 미국 코믹 연대기에 관한 영국의 답변일까. 15년 뒤에 있을 9.11에 대한 예지일까. 슈퍼 ... more

Commented by 사은 at 2008/08/09 21:42
렉스님의 영화담/음반담이야 원래 즐겁게 읽습니다만, 아 요새 수채 색연필 써주시는게, 이 채색법이 또 묘하게 렉스님 그림에 잘 맞아서 읽기가 더 즐거워지네요. :)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1 00:40
저도 나름 재미가 간만에 들어서 이것저것 해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헤.
Commented by 나르사스 at 2008/08/09 21:48
저런 관점에서 보면 다크나이트는 시니컬하면서 무서운 영화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1 00:40
아...그래도 마지막 장면의 흐릿한 희망 같은 벅참도 있었는데...이런 부족한 글로는 설명이 더 안되네요. 능력부족입니다. 흐
Commented by 비니루 at 2008/08/09 21:59
근데 하비 덴트 옷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요? 렉스님 본인?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09 22:01
고든 경사(청장으로 승진해서 HAHA[...]에게 축하박수 받음)인대요...
....
......
.......그래도 소싯적 게리 올드맨 팬이었는데 흑. 안 닮은건 팬그림은 룰이 없다는 핑계로다가;
Commented by 도일 at 2008/08/09 22:05
근데 참 착한 게리 올드만은 볼때마다 적응이 안돼요 막..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09 22:07
그래서 난 해리포터 시리즈 볼때마다
"스탠필드 경사님, 어서 저 어벙한 안경놈의 목을 조르세요. 끼일끼일"하곤 한단다(....)
Commented by 로오나 at 2008/08/09 22:07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페이스에게 10분만 더 할애되었으면. 디렉터즈 컷을 기대합니다.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1 00:41
대화 한번으로 투페이스로 바뀌는건 사실 상당히 무리하게 보이긴 했어요. 흐
Commented by twinpix at 2008/08/09 23:08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1 00:41
앗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바람의자유 at 2008/08/10 02:19
마지막 문장 정말 공감이네요 ^^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1 00:41
^^)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블랙 at 2008/08/10 07:05
"이건 널 위한거야"라고 한건 가짜 배트맨 빠돌이(....)들 아니었나요? 허수아비는 아무말 안했을 텐데요.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0 09:48
한번 더 보고 확인해보죠. 어차피 글은 수정 안 해요. 귀찮아서.
Commented by 계란소년 at 2008/08/10 18:20
아......ㅜ.ㅜ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1 00:41
ㅠㅠ)
Commented by 魔神皇帝 at 2008/08/10 22:54
영원불멸의 히스 레저가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캐릭터와의 혼연일체'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줬지요 ㅠ.ㅠ
Commented by 렉스 at 2008/08/11 00:41
병원 장면에서 아...아....OTL
Commented by willowtea at 2008/08/14 17:49
이야! 이렇게 볼 수도 있군요. 전 이 영화 한 번 보고서는, 그냥 뭔가 대단한 걸 본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뭘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정리가 통 안 돼서, 일단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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